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 (문단 편집) ==== 지적 직관과 사행 ==== 앞에서 봤듯이, 이론이성의 모든 체계는 자연의 인과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여기서 모든 표상을 종합하는 자기 의식인 '순수 통각'만큼은 자연의 인과에서 벗어나 있다. 즉 '순수 통각'의 자기 의식은 무제약적이고 자유롭다. 이에 따라 우리는 드디어 이론이성과 실천이성을 합칠 수 있게 되었다. 둘 다 자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 통각의 자기 의식과 실천이성의 도덕적 자아[* 칸트에 따르면 자유란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연의 인과법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인간 스스로가 인과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즉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으로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나는 것이, 칸트가 말하는 '자유'이다.]는 결국 모든 자아가 나의 자아임을 직관하는 '지적 직관(Intellektuelle Anschauung)'을 통해 하나의 자아를 정립한다. 이렇게 무제약적으로 분열되는 자아를 끊임없이 하나로 정립한다는 점에서 자아는 분열과 통합을 동시에 수행해 내는 '활동(Tätigkeit)으로서의 자아'이기도 하다. 사실 피히테가 생각하는 자아의 본질은 '자기의식'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다. 피히테는 심지어 (엄밀한 의미에서) '활동하는 자아'라고 말해선 안된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있어서 지성은 하나의 행동이며, 그 이상의 것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성을 활동하는 것이라고 불러서도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표현을 통하여, 그러한 활동이 머물러 있는 어떤 존립자가 지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ㅡ《학문론의 첫번째 서론 (1796)》] 자아가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활동함으로서 자아가 되기 때문이다. 즉, '''활동 그 자체'''가 바로 '''자아'''이다. 피히테에게 있어서, 활동하지 않는 자아는 더 이상 자아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피히테의 자아는 하나의 고착화된 상태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서 외부의 경험을 흡수하고 그걸 자신에게 다시 통합하는 역동적인 행위[* 여기서 행위나 활동은 생각하는 활동(관념적)도 포함되고 몸을 움직이는 활동(실재적)도 포함된다. 적어도 피히테의 의도는 그렇다.(피히테와 셸링 간의 편지에서 확인)]가 된다. 이를 '''사행'''[* 《피히테의 자아론》을 지은 백훈승 교수는 국내 학계에서 Tathandlung을 '사행'(事行)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사행은 '사실행위'(事實行爲)의 준말이다. 사실(Tat)과 행위(Handlung)가 동일하다는 뜻인데, 여기서 백훈승 교수는 Tat은 '사실'이라고 번역해서는 안되고 '행위의 산물'로 번역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즉, 행위의 산물(Tat)과 행위(Handlung)는 동일하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아는 행위하는 자인 동시에 행위의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합쳐서 백훈승 교수는 Tathandlung을 '실행'(實行)이라고 번역한다. 요약하자면, 행위로서의 자아는 '사실'로서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사실'을 함축하는 단어인 '사행'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것.](Tathandlung)이라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